리처드 1세

1189.7 아버지헨리 2세와 대결하여 왕위를 차지하다

중세 무훈담의 단골 주인공이며 소설이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맹스런 전사()이자 지휘관. 사자왕 리처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영국 국왕 리처드 1세다. 십자군 측의 전설적 영웅으로 오랜 세월 회자되어 온 그는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별다른 능력이나 치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버지 및 형제와 대결하여 차지한 왕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1133~1189)가 엘레노어와의 사이에 둔 8명의 자녀 가운데 아들은 5명이었다. 장남 윌리엄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차남 헨리는 11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아들은 리처드, 제프리, 존이었다. 리처드는 16살 때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했을 만큼 일찍부터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제프리와 존은 형 리처드를 공격했지만(헨리 2세는 이를 지지했다.) 패했고, 존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됐지만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런 사이 제프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이는 리처드와 존 형제. 이 가운데 존은 실권이 없었고 결국 아버지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의 대결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 헨리 2세(왼쪽)와 동생 존. 존은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1189년 여름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결탁하여 헨리 2세를 공격하면서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헨리 2세는 아들과의 싸움을 포기했다. 막내 존마저 리처드 편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져 병약해진 헨리 2세는 아들 리처드를 저주하며 세상을 떠났다. 이제 리처드의 세상이었다.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큰 키, 유달리 긴 팔과 다리, 떡 벌어진 어깨, 붉은 색이 감도는 금발. 1189년 7월 6일, 부왕() 헨리 2세가 세상을 떠나고 리처드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나이 32세. 공식 대관식은 9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대관식에 여성과 유대인의 참석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유대인 대표들은 새로 등극한 왕에게 예물을 바치기 위해 대관식에 나타났다.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은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리처드 1세는 이를 진압했다. 등극과 동시에 일어난 유혈 사태. 이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낸 리처드 1세의 앞날을 예고한 셈이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보여준 용맹과 무자비함

1190년 7월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 원정 준비는 전비() 조달을 위해 모든 것을 팔아 치우는 일이었다. 고위 관리들은 직위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을 내야 했다. 높은 값을 치르는 사람에게 관직을 팔았다. 성()도 높은 값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작위()도 팔았고 마을도 팔았으며, 수도원들도 권리를 유지하자면 돈을 내야 했다. 봉신()의 지위로 예속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도 막대한 돈을 받고 예속 상태에서 풀어주었다. ‘적당한 값만 치를 사람이 나타난다면 런던도 팔 것’이라 선언할 정도였다. 백성들이 혹독한 세금 부담에 시달렸음은 물론이다. 리처드에게 잉글랜드는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재원() 바로 그것이었다.

십자군 전쟁(왼쪽), 전투를 이끄는 살라딘

 

1191년 6월 초 아크레 근처에 도착한 리처드에 대해 살라딘의 측근 바하 알 딘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영국 국왕 말리크 알 인키타르는 담대하고 힘이 장사이며 인정사정 없는 열혈전사다. 아크레로 오는 도중 그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25척의 갤리선에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랑크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는 두렵고도 걱정되는 일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살라딘은 거절했다. 적이었지만 리처드는 살라딘에 매료되어 있었다. 포위당해 바깥과 단절되어 심한 기아에 시달리던 아크레의 상황은 풍전등화였다. 1191년 여름이 시작되면서 아랍 전사들의 상황은 절망으로 치달았다. 결국 1191년 7월 11일, 십자가 깃발이 성벽 위에 나부꼈다.

살라딘은 포로 문제를 협상하기 위한 전갈을 리처드에게 보냈지만, 리처드는 포로 문제로 시간을 보내기 싫어했다. 살라딘은 십자군 포로들을 석방한 적이 있었지만, 리처드는 2천7백 명의 무슬림 병사들과 3백여 명의 여성 및 어린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함께 싸우던 필리프 왕이 귀국해버리고 십자군 내부 알력도 심한 가운데, 리처드는 아르수프 연안 지대와 다룸 지역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성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192년 9월, 5년 기한의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십자군 세력이 해안 지방 일부를 차지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은 살라딘이 차지하는 조건이었다. 또한 살라딘의 통행증을 발급받은 순례자들의 성지 통행권을 보장하는 조건이었다.

 

사로잡혔다 풀려나 동생의 반역을 진압하다

휴전협정을 맺은 1192년 9월 리처드는 고국으로 향했다. 동생 존이 필리프 왕과 결탁하여, 자신이 프랑스 내에 소유한 땅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존이 형 리처드의 왕권까지 빼앗으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 해 성탄절이 되도록 리처드의 행방은 묘연했다. 리처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바닷길을 싫어한 리처드는 변장하여 육로를 통해 이동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에게 붙잡혀 있었다. 레오폴트 5세는 십자군 원정 때 리처드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었다. 리처드는 국왕인 자신의 깃발과 공작인 레오폴트의 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깃발을 빼앗아 진흙탕에 던져버렸던 것.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를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 넘겼다. 하인리히 6세도 높은 액수를 제시하는 이에게 리처드를 팔 생각이었다. 어머니 엘레노어가 나서 석방을 위한 몸값을 제시했고, 존과 필리프 왕도 몸값을 제시하며 리처드를 잡아 둘 것을 요청했다.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에게 동생의 반역 소식을 알려주며 1194년 2월 리처드를 풀어주었다. 막대한 몸값은 잉글랜드 백성들의 부담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존은 프랑스로 도망갔다. 고국에 도착한 리처드는 상황을 역전시켰다. 존을 지지했던 귀족들은 리처드에게 자비를 구했다. 리처드는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노르망디에 진을 쳤다. 존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리처드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리처드는 존을 용서하고 영지의 일부를 돌려주었다.

 

'사자의 심장을 지녔을지언정 영혼은 지니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서부 앙주 지역을 통치한 귀족 가문에 기원을 둔 왕가 출신이었다. 더구나 리처드 1세가 재위 기간 중 고국에 머문 시간은 반년 남짓이었다. 잦은 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춥고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불평하며 잉글랜드 땅 자체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재위 기간 대부분을 타국에서 전쟁을 하며 보냈으니, 막대한 전비는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이 되었다. 국왕이 오랜 시간 고국을 떠나있으니 정치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점수를 매긴다면 결코 후할 수 없다. 그는 ‘싸웠을 뿐 다스리지는 못했다.’ 또한 ‘사자의 심장을 지녔을지언정 영혼은 지니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리처드 1세의 머리는 쁘아뚜의 샤루 수도원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에,
그리고 나머지 유해는 앙주의 퐁테브로 수도원(위)에 묻혔다.

 

그럼에도 그는 무훈담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 용맹이 후대에까지 전설적으로 회자되어 왔다. 역대 잉글랜드 국왕 가운데 그처럼 숫자가 아니라 별칭, 즉 사자왕 또는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로 후대에까지 널리 일컬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으면서도 백성들로부터는 신앙심 깊은 왕으로 평가 받으며(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 때문이었지만), 후대에까지 잉글랜드의 상징적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하겠다. 그 아이러니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근대 유럽 여러 나라가 제국주의 확장을 추진하던 시기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군주, 귀족들을 전설적 영웅으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은 리처드 1세, 독일은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등이다.

사자왕의 마지막은 허무했다. 1199년 3월 리처드는 리모주에서 리모주 자작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3월 25일 초저녁 리처드는 갑옷을 입지 않고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상처가 심하게 곪아 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리처드의 머리는 쁘아뚜의 샤루 수도원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에, 그리고 나머지 유해는 앙주의 퐁테브로 수도원에 묻혔다.

 

 
sun
sun 영
2018-04-20


0

구인ㆍ구직 알림신청